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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3·1운동을 돌아보다

입력 : 2019-02-21 16:38:47
수정 : 2019-03-02 16:56:24

편집자주> 

3·1운동 100주년 맞이하여 파주의 독립운동가와 사적지를 파주시민에게 소개한다. 파주에는 7곳의 사적지와 160명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이분들의 독립운동으로 우리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주체적으로 역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선열 독립운동가에게 깊이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이 지면을 편집했다.

독립운동 사적지

정태진 집터 :경기도 파주시 금촌2동 1018 

정태진은 파주 금능리 출신 한글학자였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정태진은 그야말로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2년간 징역을 살았다. 정태진이 일하는 함흥 영생여고 학생들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던 것이 계기였다. 증인으로 불려가 재판을 받고 정태진과 일하던 한글학자들이 줄줄이 검거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라 불렸다.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해방 후 정태진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은 다시 모여 <우리말큰사전>을 출판했다. 1952년 죽는 해까지 <우리말큰사전>의 속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태진이 태어난 집터 위에 정태진 기념관이 세워졌다. 기념관이 있는 공원 옆에는 도서관이, 맞은편에는 초등학교가 있다. 

 

반하경 순국지 :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동패리 1270

“내시와 외관(外官)이 천함과 귀함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임금이 하정(下庭)하였으니 내 어찌 감히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반하경은 내시부에서 일했다. 승전색이라는 벼슬을 내려놓은 건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항변하기 위해서였다. 고향 파주로 돌아온 반하경은 5년 뒤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없다 말하곤 거친 길 위에서 목숨을 끊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합병, 병합, 합방이라는 말로 꾸며온 경술국치의 날이었다.

삽다리 사거리는 현재 포장도로로 덮여 청석로와 덕이로, 교하로를 잇고 있다. 100년 전 나라를 잃은 아픔이 새겨진 곳이라곤 생각지 못한 그 길을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걸어보는 게 어떨까.

 

 

심상각 생가와 묘소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심궁로43번길 45

공릉장 3·1운동을 주도한 우산 심상각은 만세시위 후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신교육을 받던 심상각이 박남파로 알려진 박찬익의 추천으로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게 되고, 이후 신규식이 설립한 동제사에 가입하기도 했다. 동제사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후원하기 위한 무역 회사로 김규식과 여운형이 파리 강화회의에 참여할 여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인재양성에 힘썼다. 고향인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민족주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54년 사망 후 1977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광탄면 신산리 생가에는 현재 심상각의 손자가 살고 있으며, 심상각 묘소는 생가 뒷산 선영에 모셔져 있다.

 

정태진 집터 :경기도 파주시 금촌2동 1018

정태진은 파주 금능리 출신 한글학자였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정태진은 그야말로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2년간 징역을 살았다. 정태진이 일하는 함흥 영생여고 학생들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던 것이 계기였다. 증인으로 불려가 재판을 받고 정태진과 일하던 한글학자들이 줄줄이 검거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라 불렸다.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해방 후 정태진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은 다시 모여 <우리말큰사전>을 출판했다. 1952년 죽는 해까지 <우리말큰사전>의 속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태진이 태어난 집터 위에 정태진 기념관이 세워졌다. 기념관이 있는 공원 옆에는 도서관이, 맞은편에는 초등학교가 있다.

 

파주의 독립운동가 

박찬익 (1884~1949)

1918년 '무오 독립 선언' 39인 중 1인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한성 임시정부 편정관 선출, 1921년 임시정부 외무부에서 외교 임무 실질적 전담

광복 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 활동

 

윤복영 (1868~1969)

1919년 북로군정서 가담,

1922년 만주 독립세력 결집을 위한 전만통일준비회 집행위원 활동, 신민회 총괄적 운영 지도하며 활약 

 

윤기섭 (1887~1959)

경술국치 후 만주로 망명, 신흥강습소의 운영자금을 마련하여 신축,

이후 신흥무관학교 승격, 발전된 후 교감을 맡아 1920년 폐교까지 2100여명의 독립군 정예 양성

 

유광렬 (1898~1981)

탄현면 낙하리 출생 언론인

1919년 매일신보사 입사를 시작으로 당시 우리말로 발행되던 민간 3대지와 매일신보의 네 신문사에 모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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